‘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흑백 같은 청년의 삶, 기성 세대 반성 필요”
Q.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인데,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나.
성혜의 삶 자체가 흑백이다. 자식에게 의지하는 부모님, 철없는 남자친구까지 성혜가 웃을 만한 일이 없다. 컬러는 정보를 주기 때문에 어두운 성혜의 삶에 오롯이 다가가기 어렵다. 컬러였다면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성혜가 웃을 일 없고 무표정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성혜를 웃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강아지다. 성혜가 강아지를 보고 웃는 장면 마저 없었다면 관객들은 숨 막혔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서 엔딩이 판타지적으로 보여야 했다. 흑백이 판타지적인 면을 잘 소화할 수 있어 골랐다. 음악을 넣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다.
Q. <82년생 김지영>과도 비교해 평가되기도 하는데.
<82년생 김지영>이 우리 사회 인식의 문제라면 <성혜의 나라>는 국가 제도의 문제다. 냉정하게 보면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은 그나마 결혼‧육아 등 기본 생활은 영위하며 산다. 하지만 성혜는 그런 기초적인 생활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성혜의 문제는 시스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두 작품은 이러한 차이가 있다.
Q.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상당히 파격적인 결말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떤 메시지를 담았나.
기성세대가 성혜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파격적인 결말은 아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 이러한 판단을 내렸기에 파격적으로 보이는 것 뿐이다. 영화 말미 성혜가 “나 좀 편하게 살래 나 이렇게 살아도 누가 나한테 뭐라고 안 하겠지”라고 말한다. 성혜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산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만약 모든 청년들이 성혜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아마 이 사회는 힘들어질지 모른다. 농촌을 예로 들면, 농촌이 활력을 잃은 이유는 젊은 세대가 도시로 이주하며 인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비슥한 맥락에서 청년 세대가 일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우리 사회 전체가 농촌과 같은 결말을 맞을 수 있다. 이러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Q. 정 감독의 자전적 사례가 영화에 소재나 대사가 된 것이 있나.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 지하방 살이, 공황장애 등 경험이 영화 소재로 쓰였다. 성혜가 그동안 누적된 스트레스와 임신에 대한 공포로 공황장애를 앓게 되는데, 나도 40살에 공황장애가 왔다. ‘지금까지 나는 뭘 했나’, ‘앞으로 뭘 해야 하지’ 등 고민으로 불안감이 생긴 것 같다. 평소 낙천적인 성격인데도 그런 불안감이 나도 모르게 쌓였다. 이러한 경험이 영화에 녹아있다.
Q. 정 감독 세대의 청년의 삶, 지금 세대 청년의 삶을 비교한다면.
나도 청년일 적엔 지금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고생을 많이 했다. 다만 민주화를 경험한 우리 세대와 산업화를 경험한 이전 세대는 개인의 삶보다는 사상과 거시적인 명분을 추구했고, 그 속에서 낭만이나 꿈을 좇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한 경쟁 사회가 되다 보니까 이러한 것들이 없어졌다. 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Q. 청년의 삶이 어쩌다 이렇게 빈곤해지게 됐다고 생각하나.
‘부익부 빈익빈’ 문제가 크다. 자본의 쏠림 현상이 심해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몰리고 서열문화가 만들어져 삭막해졌다. 이로 인해 경제 상황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빈곤해졌다. 사회에서 인간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가난해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최소한 인간적이면 삶 자체가 팍팍하진 않다
Q. 여러 빈곤 문제 중에서도 청년 빈곤은 사회적, 특히 기성세대의 공감을 잘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청년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청년들에게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너희 힘으로 알아서 살아라’라고 말한다. ‘청년 빈곤’이란 말 자체에서 주는 어색함도 있다. 청년 문제는 인식 문제가 아닌 국가 시스템의 문제다. 그대로 놔두면 국가 미래가 어려워진다. 국가의 시스템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고민을 해봐야 한다. 정치인이나 국가 정책 입안자가 이 영화를 보고 심각한 위기를 느꼈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정치인들을 초대해 영화 관람 후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어렵게 됐다. 아쉬운 대목이다.
Q. 이 영화를 기성세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길 바라는지.
청년들을 방치하지 말고 힘 내게끔 도와야 한다. 청년 빈곤 문제가 해결돼야 저출산, 비혼, 등 사회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기성세대인 나조차도 출산과 육아를 고민하는데 청년 세대는 어떻겠나. 기성세대가 청년 빈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위기의식을 느낄 필요가 있다.
출처 : 투데이신문(http://www.ntoday.co.kr)